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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자,해외/벨기에

[벨기에] 겐트(Ghent) - 중세 기사도의 도시를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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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벨기에 겐트(Ghent) - 중세 기사도의 도시를 찾아라 


 

  - 기간 : 16. 5. 23.(월) 오후 ~ 26(수)

  - 날씨 : 구름 많거나 비, 흐림, 차츰 갬

  - 사진 : 코닥 Ektar 100, 펜탁스 MZ-S, FA31 Limited, FA43 Limited, FA77 Limited




 암스테르담에서 앤드워프를 반나절 거쳐, 겐트에서 3박을 하게 되었습니다.


 숙소는 그란베스틴성 바로 앞에 있는 작은 3성급 호텔이었고, 날씨는 잔뜩 짓푸렸지만 제겐 너무 행복한 도시였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겐트라는 도시를 거점으로 잡은 이유는 바로 이 사진 한 장 때문입니다.


 여행하는 기간 중 유일하게 날이 화창했는데, 그 어디에도 찾아보기 힘든 낯선 유럽 도시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헨트(네덜란드어: Gent, 프랑스어: Gand 강[*], 영어: Ghent 겐트[*])는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자체에 위치한 도시 지방 자치체이다. 헨트는 오스트플란더렌 주의 주도이자 가장 큰 도시이다. 헨트는 석기 시대에 스헬데 강과 레이에 강에서 온 이주자들이 정착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또한 중세 시대에는 북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부유한 도시가 되었다. 현재는 항구와 많은 대학교로 붐비는 도시이다.


헨트에는 여러 유물들이 발견되는데, 이러한 유물로 석기 시대와 철기 시대 동안 스헬데 강과 라이에 강에서 이주민들이 현재의 헨트 지방에 정착했다고 추측된다. 대부분 역사가들은 헨트의 옛 이름이 '간다'라고 추측하는데, 여기서 '간다'는 켈트어로 합류를 뜻한다.  로마 제국 시대의 기록에서 헨트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지만, 유물 발굴을 통해서 로마 제국 이전보다 더 오래전에 헨트에 정착했었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었다.


프랑크 족이 로마 제국의 옛 영토로 침략했을 당시 (대략 기원후 4세기 말~5세기 초), 프랑크 족은 그들의 언어를 헨트 지방에 들여왔고, 이로 인해 켈트어와 라틴어는 고대 네덜란드어로 대신하게 되었다.


650년 경 성 아만두가 헨트 지방에 두 수도원을 짓게 되는데, 바로 생 피터 수도원과 생 바브 수도원이다. 헨트는 이러한 수도원과 상업 중심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800년 경 샤를마뉴 대제의 아들인 루트비히 1세는 아인하르트를 샤를마뉴 대제의 역사가, 동시에 헨트에 있는 두 수도원의 수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851년과 879년에는 각각 두 차례씩 바이킹의 공격을 받아 약탈당하기도 하였다.


헨트는 11세기 동안 바이킹의 공격에서 회복하고 다시 발전했다. 13세기 동안 헨트는 파리 다음으로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그 규모는 런던과 쾰른, 모스크바 보다도 더 컸었다. 그 당시 헨트의 인구는 65,000명에 육박했다. 현재, 헨트에 있는 종탑과 생 바브 대성당, 생 니콜라 교회의 탑들은 당시 시대의 역사 중 약간의 예에 불과할 뿐이다.


현재는 섬유공업 외에 기계공업 등이 성하다. 9∼12세기의 고성(古城), 13∼16세기의 고딕식 대성당, 12세기의 로마네스크풍 교회, 14∼16세기의 시청사 및 1816년 창립한 대학 등이 있다.  겐트는 주변 도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해발고도의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예로 부터 교통의 중심지 였고, 방직 등 산업이 일찍 발달해 경제적인 풍요와 그에 따른 자치를 누렸다. 내륙지방에 위치하고 있지만 겐트-테르뉴젠 운하(Thent-Terneuzen Canal)로 북해와 연결 된 벨기에에서 세번째로 큰 항구도시이다. 항만에는 시드마(Sidmar), 볼보(Volvo), 혼다(Honda), 스토라 엔조(Stora Enso) 등 유수의 기업들이 모여 있다.  또, 벨기에를 엑스(X) 자로 관통하고 있는 17번과 40번 고속도로가 겐트에서 만나고, 벨기에에서 세번째로 큰 기차역이 있어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도시 중심과 남쪽에는 1816년에 창설된 겐트 대학과 (Ghent University) 유명한 연구소들이 자리잡고 있는 대학도시이 이며 벨기에의 브뤼헤 못지 않게 잘 보존 된 중세시대 건물들로 인해 이 도시에서도 관광산업이 점점 도시 총 생산량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 다닌 곳들 (구글 맵)










#. 겐트의 사람들




겐트의 사람들은 내가 가 본 어느 유럽 도시 사람들보다 차분하고 동시에 밝았다.

동양의 낯선 내 시선을 반갑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고, 트램안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연신 나를 처다본 꼬마아이도 있었다.





구름이 끼고 바람이 불면 금방 싸늘해지는 유럽의 날씨는 재미있는 복장을 만들어낸다.

겐트에서도 예외는 아니었고, 코트에서 반팔까지 가지각색의 패션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그들에게도 커다란 건축물을 작은 화각안에 담아내는건 여간 쉽지 않은 일인가 보다.











































겐트인, 그들은 여유를 즐길 줄 알고, 풍부한 감정표현 능력을 가졌으며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단, 물가는 매우 비싸다.
유럽에서 3대 물가가 높은 도시이므로 식당을 찾을땐 모두 저와 같이 메뉴와 가격을 주시하게 될 것이다.





#. 세인트 마이클 다리 (St Michael's Bridge)




겐트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다리입니다.
다리에서 내려다보는 코렌레이와 그라이슬레이, 벨포트에서 성바프대성당까지. 찍으면 화보가 되는 그런 곳이죠.












































#. 그라이슬레이와 코렌레이 (Graslei and Korenlei)





중세시대 항구였던 곳으로 당시의 길드 하우스 건물들이 레이에 강 사이로 양 옆으로 늘어서 있습니다.

그라슬레이는 허브와 야채의 거리라는 뜻이고 코렌레이는 밀의 거리라는 뜻으로 과거 이곳에서 거래되던 작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래된 중세 항구에 위치한 겐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변이자 쉼터가 되었습니다.

해안가를 따라 관광객들과 16~17세기 길드의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성 바프 대성당 (Saint Bavo's Cathedral)






15세기의 사실주의 회화의 백미로 손꼽히는 '얀 반 에이크'의 제단화(어린양에대한경배)로 아주 유명한 곳이다.

네덜란드 화가로 유럽 북부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적인 화가임. 유화를 발명한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색체가루(안료)를 최초로 기름에 섞어 사용했음. 종래의 양식이나 구도에 구애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자연을 관찰하여
현실 세계의 세세한 부분을 섬세하고 정교하게 표현하였으며, 경건한 종교적 신앙심을 표현했다.
플랑드르지방에 초상화장르를 확립하기도 했는데, 새로운 시야와 기교를 제공하여 후대의 큰 영향을 주었음.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제단화가 꼽히며, 종교화 및 초상화를 많이 남겼다.
참고로 이 제단화는 스탕달 신드롬이 일어날 정도로 어마어마 했다.

성당은 입장료가 없으나, 이 제단화를 보기 위해서는 4유로를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충분히 지불할 가치가 있다.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1441) 1432년에 완성한 겐트 제단화는

15세기 플랑드르 회화의 불후의 명작으로

성 바봉(St Bavon) 대성당에 걸려 있다.

이 다폭제단화는 경첩이 달린 총 12개의 패널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8개는 양면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겐트 제단화는 15세기 초 겐트 시의 시장이었던 요스 베이트(Joos Vijdt)

가족 경당을 장식할 제단화로 에이크 형제에게 주문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제단화는 겐트 시의 수호성인 세례자 요한과

베이트 가문의 수호성인 사도 요한에게 바쳐진 것이었다.

 

이 제단화가 보여주는 중심 주제는 구원의 신비다.

구원은 기독교의 핵심사상으로,

화가는 구원의 신비라는 추상적 개념을 시각화하는데 있어

제단화 겉면에서 시작하여 제단화 안쪽에서 끝을 맺는 방법을 택했다.

 

제단화가 닫히면 화면은 삼단으로 나뉜다.

하단에는 그리자유 기법으로 재현된 세례자 요한과 사도 요한이 중앙에 있고,

바깥쪽에는 이 제단화의 봉헌자인 요스 베이트와 그의 아내 이사벨 보루트가

기도하는 자세로 고딕식 벽감 속에 있다.

세례자 요한은 왼팔로 양을 안고 오른 손가락으로 양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은 요한복음 1 29절을 시각화한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사도 요한은 뱀이 담긴 독배를 들고 서 있다.

그는 요한복음서와 요한묵시록의 저자이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은 성령으로 예수님께 세례를 주었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임을 최초로 증언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구원의 역사를 사도 요한이 요한묵시록으로 결론지었다.

 

중앙 패널에는 가브리엘 대천사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주님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이 장면은 루카복음 1 28-38절의 내용이다.

천사는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을 들고 말한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마리아의 머리위에는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리고 있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그런데 주님 탄생 예고가 이루어지는 곳은 나자렛이 아니다.

15세기 부유한 시민계급의 저택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천사의 뒤편 창으로 보이는 도시풍경은 플랑드르 건축양식의 특징을 지닌다.

사람들은 밝은 빛이 가득한 거리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부활을 상징하는 제비가 하늘을 날고 있다.

그리고 마리아가 있는 실내에는 상징적인 물건들로 가득하다.

오른쪽 창 앞의 기도대 위에는 성경이 펼쳐져 있고,

벽감 속에는 번쩍이는 촛대가 놓여 있다.

창가에는 통과된 빛이 물에 반사되고 있는 유리병이 있는데,

이는 마리아의 처녀성을 건드리지 않고 예수님을 잉태하였음을 상징한다.

화면 중앙의 창 옆에 걸린 하얀 수건과 대야와 주전자도 순결을 상징한다.

 

상단에는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한 구약의 예언자 즈카르야와 미카가

예언을 알리는 필사본을 들고 있고,

이교도의 무녀인 에리트레아와 쿠마이가

너울거리는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즈카르야 예언자의 머리 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즈카르야 9,9)

미카 예언자의 머리 위에도 이렇게 쓰여 있다.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미카 5,1)

그리고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한 내용이

무녀들의 두루마리에도 적혀 있다.

 

 

제단화가 열리면 화면은 천상과 지상으로 나뉜다.

화면 상단의 중앙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홀을 쥐고

오른손을 들어 축복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하느님께서 정면으로 앉아 계신다.

교황의 삼중관을 쓰신 하느님의 발 앞에는 왕관이 놓여 있다.

이는 그분께서 영적으로는 교황의 권위를 지니고 있으며,

세속적으로는 왕 중의 왕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좌우에는 보관을 쓰고 책을 읽고 있는 동정녀 마리아가 있고,

책을 무릎에 놓고 하느님을 가리키는 세례자 요한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데이시스(Deissis)를 연상시키는 자세이다.

 

데이시스는 좌우로 확장되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노래하는 천사들과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천사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천사들은 데이시스가 위치한 공간과는 다른 공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기서도 현실 공간의 깊이에 대한 화가의 집요한 탐구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유화물감의 능숙한 사용으로 진하게 흠뻑 스며든 색체는

미묘한 빛을 발산하며 상징적 의미들로 가득하다.

 

화면 상단 제일 가장자리에는 원죄의 근원인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은 몸을 가리고 벽감 속에 서 있다.

또 그들 머리 위로 카인과 아벨의 제사 장면과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는 장면이 부조처럼 묘사되었다.

아담과 하와는 반 에이크의 사실주의와 빛의 마술을 가장 잘 보여준다.

특히 아담의 나신은 빛을 이용해 피부의 세밀한 부분까지도 잡아내는

사실적 묘사가 뛰어나다.

원근법을 이용해 묘사한 공간에 있는 아담의 환상적인 캐릭터와

아담의 팔과 다리에 드리워진 그림자에서 화가의 명암법이 빛을 발한다.

아담은 그늘진 벽감 속에서 힘차게 등장하고 있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기색이 역력히 나타나며,

앞으로 내딛는 아담의 오른쪽 다리와

관람자가 있는 공간을 향해 돌출한 발은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제단화 하단 5개의 패널에는 망막한 하늘을 배경으로 푸른 초원 위에서

어린양에 대한 경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비둘기 형상을 한 성령은 동산 전체와

멀리 보이는 천상 예루살렘에까지 자비의 빛을 비추고 있다.

 

그림의 중심에는 붉은 제단이 있고,

제단 위에 어린양이 수직으로 서 있다.

어린양의 가슴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려

제단 위에 놓인 성작에 떨어지고 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아담의 원죄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희생 제물이 되어 성작에 그 피를 흘리고 있다.

제단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

 

제단 앞에서는 두 천사가 어린양의 신성함을 알리기 위해 향을 치고 있다.

제단 뒤편에는 천사 네 명이 예수님의 수난 상징물을 들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묶여서 채찍질을 당한 기둥과 채찍,

십자가 죽음을 뜻하는 십자가와 가시관과 못,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창,

신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들고 있다.

나머지 천사들은 제단 주변에서 합장을 하고 무릎 꿇어 경배하고 있다.

 

중심축을 따라 화면 하단으로 내려오면,

열두 제자를 상징하는 열두 줄기의 물이 팔각형 분수에서 떨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는 다음과 같은 성경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그래서 증언하는 것이 셋입니다.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하나로 모아집니다.”(요한 1 5,6-8)

 

화면 하단 왼쪽에서 제단을 향해 무릎 꿇고 앉아

예언서를 펼치고 있는 사람들이 예언자들이다.

그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은 구약성경의 의인들이다.

그 중에는 이교도의 시인과 철학자들도 있는데,

흰 옷을 입고 월계관을 쓴 사람은 아기의 오심을 예견했던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이다.

 

화면 하단 오른쪽에서 검소한 옷을 입고

맨발로 무릎 꿇고 있는 사람들이 사도들이다

그들 뒤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위계질서에 따라

삼중관을 쓴 교황과 그의 시종 부제들,

주교들과 사제들이 순교를 상징하는 붉은색 제의를 입고 있다.

그 중 성 스테파노(St Stephanus)는 돌멩이를 제의 앞자락에 받쳐 들고 있고,

성 리에벵(St Lievin)은 집게로 뽑은 자신의 혀를 들고 있어

그들이 어떤 성인인지 쉽게 알아보게 했다.

 

화면 상단 왼편에서 녹색 숲을 배경으로 푸른 옷을 입고

제단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신앙을 고백한 교황과 추기경과 주교와 사제와 수도자들이다.

반대편에서 화관을 쓰고 종려나무를 들고 걸어 나오는 여인들이 있다.

그들은 순교로 신앙을 증언한 동정녀들이다.

특히 맨 앞줄에 서 있는 성녀는 그들이 들고 있는 상징물로

그 이름을 쉽게 알 수 있다.

어린양을 치마폭에 안고 있는 성인은 성녀 아녜스,

세 개의 창이 뚫린 탑을 들고 있는 성인은 성녀 바르바라,

담비 털로 된 공주 옷을 입고 있는 성인은 성녀 카타리나,

꽃바구니를 들고 있는 성인은 성녀 도로테아이다.

 

하단부의 왼쪽 패널에는 판관들과 그리스도의 기사들이

언덕길을 말을 타고 이동하고 있고,

오른쪽 패널에는 은수자와 순례자들이

자갈길을 맨발로 이동하고 있다.

그리고 맨 오른편에 붉은 옷을 입고 있는 키가 큰 사람이

여행자의 수호성인인 성 크리스토폴이다.

 

이 제단화에 표현된 인물들은 그들이 속한 시간과 공간의 구별 없이,

사회적 지위와 인종적 차별 없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피를 흘린 어린 양을 경배하고,

영원한 천상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천상 예루살렘에 모이고 있다.

 

천상 예루살렘에는 무화과 나뭇잎이 우거지고

포도송이가 탐스럽게 달려 있다.

붉은 석류꽃이 핀 언덕 너머로 멀리 보이는 천상의 도시에는

15세기 건축 양식으로 된 중앙집중식 팔각형 건물이 우뚝 서 있다.

그러기에 이 제단화는 종교가 지니는 초월성과 현실성이라는 두 개념을

배경을 이루는 풍경화를 통해 하나로 일치시키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제단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아담과 하와로 시작된 인류의 죄가

어린양이 흘린 피로 속죄되고,

이러한 구원의 신비를 경배하기 위해

천하 만물이 시공을 초월하여 순례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출처 : http://blog.naver.com/sonyh252/120142408046



성당은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과 후기 고딕양식을 볼 수 있음. 





그리고 성당 한 편에서 하프 소리가 들려왔는데, 알고 보니 라이브 연주였다.







하프의 신비한 소리가 성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다른 음향 효과는 전혀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성당이 주는 레코딩 기술이랄까..








#. 벨포트 (Het Belfort van Gent)



벨포트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종탑의 높이는 96M입니다.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어, 탑의 끝까지 편하게 올라갈 수 있으며 중간 중간에 시계태옆과 종 등을 볼 수 있는 1,2층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입장료는 6유로 이며, 올라가면 겐트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으므로 꼭 올라가보길 권합니다.



















































#. 니콜라이 교회 (Saint Nicholas' Church    )








벨기에에서 가장 오래되고 눈에띄는 랜드마크이다.

기존에 있던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를 대체하기 위해 13세기 초에 건설되기 시작했다.
탑 부분을 푸른 계열의 돌을 사용하여 전체적인 회색빛을 감싸고 있다.
분주 한 Korenmarkt 옆에 겐트의 옛 무역 센터 가 있었다.(밀 시장), 세인트 니콜라스 교회는 누구의 회원 근처 사업을 수행 길드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길드는 14 및 15 세기에 교회의 측면에 추가 된 자신의 예배당이 있었다.
겐트시는 교회를 위해 투자를 했다. 중앙 탑, 관측소 역할을하고 겐트의 이웃 종탑이 구축 될 때까지 마을의 종소리를 책임졌다. 

교회의 보물 중 하나는 유명한 프랑스 오르간 빌더 아리스티드 Cavaillé-콜에 의해 만들어졌다.

중세상인 무역관이 바로 옆에 있어 그들이 주로 다녔고 ;부유한 길드 상인의 성당; 으로 불리기도 했다.
성당내부의 고딕식 아치형 높은 천장과 기교를 부리지 않은 평범한 석주, 성모마리아 상과 성 니코라스상, 흘러내리는 주름 형태의 대리석 조각이 사람을 압도한다.

중세상인 무역관이 바로 옆에 있어 그들이 주로 다녔고, 부유한 길드 상인의 성당으로 불리기도 했다.
성당내부의 고딕식 아치형 높은 천장과 기교를 부리지 않은 평범한 석주, 성모마리아상 등의 대리석 조각이 사람을 압도한다.























교회 뒤편은 공원처럼 조성되어 좋은 휴식처가 되었다.








건축을 좋아해 많은 성당, 교회를 바 왔는데 

내가 벨기에를 가기로 마음 먹은 아니 겐트를 3박하기로 결정한 가장 결정적인 건축물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동양인들이 생각하는 유럽의 중세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건축물이지 않을까?






#. 메헬 교회 (St Michael s Church)




1440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825년 완공되었다.
기존에 교회가 있었는데, 13세기 화재로 인해 거의 모든것들이 유실되었다.
내부에 눈에 띄는 것은 1,628에서 1,630 사이 십자가에서 앤서니 밴 Dyck, 그리스도에 의해 그림입니다.
1566 년 우상 파괴 서양 탑의 구성을 중단. 만 1658 년이 작품은 다시 시작되었다. 
1662 Livinus Cruyl에서 디자인 (앤트워프 우리의 레이디의 성당의는 123m, 세인트 Bavo 성당에서 불과 89m입니다 비교) 브라 반트 고딕 양식의 134 미터의 타워를 구상. 이 탑은 다양한 장식으로 건립될 수 있었지만 재정적 인 이유를 들어 야심 찬 탑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교회에 들어가면 교회 탑 건립에 대한 역사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디자인이 점점 바꼈다가 결국 탑이 없는 오래된 교회가 되었죠.
이 교회 주변을 걷다 보면 시간 여행을 한 듯한 기분이 듭니다.











#. 외양간 (Stadshal)



양들의 외양간이라는 뜻으로, 겐트 시청 시계탑 사이에 서있는 건물.
현대적인 건물인데, 겐트에서 처음 이 건물을 짓는 것에 대해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특이한 나무형태의 지붕이 있어 아래쪽에서는 콘서트장, 길거리마켓, 바, 자전거주차장 등으로 쓰이고 있다.



<그림. 설계 및 철골 구조 >



겐트시의 광장에 어떤 구조물을 들어놓는 것이 맞을까,에 대해 심도있게 토론하는 지역 주민들의 모습이 대단히 새롭다.


사실 말안장 같이 생긴 이 구조물이 개인적으로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았다.


대신 밑에서 술마시고 이야기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어쩌면 현재와 과거의 조화를 시도하는 듯 한 모습이랄까?




#.  제임스 교회 (Sint-Jacobskerk)




1093년 목조교회가 처음 지어지고, 로베트2세에 의해 교회가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다.
교회는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14세기에 교회의 예배당과 길드의 측면을 확장한다.
교회는 조선사 Palfjin의 무덤이고 그림도 그려져 있다.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를 한 참 찾았다.
여러 번 증한 탓에 상당히 큰 규모의 교회였고, 역시 오래된 세월이 충분히 느껴져 깊은 감동을 주었다.




#.  그라벤스틴 성 (Gravensteen Castle)





1180년에 카운터 필립이 지은 성으로 십자군 성을 모델로 지었다

이 성이 지어지기 전, 목조로 지어진 성이 있었다.

그러다 14세기경 성이 무너져 일부는 주택으로, 일부는 공장 부지로 쓰이기도 했다.

1885년 겐트는 도시 성을 구입하여 복원에 착수했고,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겐트성에서 내려다 본 코렐라이와 그라이슬레이.






 성 바프성당, 벨포트, 니콜라이 교회.
















































#.  겐트 대학과 공원 등 주변 풍경 













































































벨기에의 전형적인 아르느보양식의 건축물에 살고 있는 사람들.






































































#.  겐트의 그라피티 





겐트는 그라피티의 도시로도 유명합니다.
락카 하나를 들고 벽에 낙서를 하는 그라피티 예술은 겐트시에서 특정 공간을 아예 그라피티 구역으로 설정해 둘 정도 입니다.
지정된 장소 외에도 도시 한 켠 담벼락은 이렇게 예쁜 낙서장이 아니 예술 공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 겐트의 야경 (Ghent's Night view)

겐트의 야경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치안도 안전하기 때문에 늦은 밤까지 돌아다녀도 걱정 하실 필요 없구요.




















































야경까지 완벽한 이 도시, 너무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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