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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자,해외/네덜란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Amsterdam) - 운하와 자유가 넘쳐나는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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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Amsterdam) - 운하와 자유가 넘쳐나는 도시 


 

  - 기간 : 16. 5. 21.(토) 저녁 ~ 22(일)

  - 날씨 : 구름 많거나 비, 흐림

  - 사진 : 코닥 Ektar 100, 펜탁스 MZ-S, FA31 Limited, FA43 Limited, FA77 Limited




암스테르담은 주말만 되면, 유럽의 청춘들이 모두 모이는 도시라고 하더군요.



합법적인 성매매, 동성간 결혼 인정, 마리화나 자유 그리고 피를 끓게 하는 EDM 까지.



덕분에 주말에 암스테르담 숙박비는 가히 살인적입니다. 어디 하나 만만한 호스텔 찾기 어려울 정도에요.




걷는걸 좋아하는 저에게 암스테르담은 아주 예쁜 동네였습니다.



볼거리 가득한 암스테르담에서 1.5일은 너무나도 짧았지만, 열심히 발품 팔아가며 걸어다닌 끝에 많은 걸 보고 왔어요.



  * Jodan 지역, 안네의 집, 고흐 미술관, 하이네킨박물관, 구시가지, 홍등가 가이드 투어 등




#. 구글 지도





















운하를 따라 가지런히 세워진 자전거들.



네덜란드가 자전거 천국이 된 이유가 뭘지 문득 궁금해졌다.































집들이 다닥 다닥 붙어 있는 네덜란드의 건축 양식은 인근 벨기에 지역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반이 약한 네덜란드의 특성 때문에, 집들을 총총총 붙여 지으면서 지지력을 높이기 위한 환경적인 영향이라고 한다.



내가 묶었던 집도 4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정말 보기만 예쁘지 살기는 쉽지 않았다.



집들이 하나 같이 오래되어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고, 폭이 좁아 층을 오르내리는 계단의 경사도가 정말 상상 초월이다.



내가 2층에서 묶었는데, 케리어 가지고 오를 생각에 정말 막막할 정도였으니까... 술 취하면 집도 못 들어 가겠더라....















교회인데 바로 뒤쪽으로 안네의 집이 있다.



내가 살았던 집이 안내의 집과 똑같은 형태여서 나는 길게 늘어진 입장 대기줄만 구경 했다.



저 교회 앞에는 안내의 희생을 추모하는 작은 동상이 서 있다.




















서교회를 중심으로 왼쪽에서 4~5번째에 위치한 집이 안내의 집이다..



비오는 일요일 9시 였는데, 이미 입장하려는 줄이 한참 꼬리를 물고 서 있었다..



서양인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우리와 많이 달라서, 사실 내가 이런 사태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작은 빵집에 들어가 아침을 먹었다.



'Breakfast Combo'는 향긋한 크라상과 스크럼블, 100% 오렌지 쥬스와 에스프레소 한 잔하여 7.5유로.



유럽에 가면 바게트나 크라상을 먹으라 했다. 동네 빵집에서.



정말 너무나도 향긋해 냄새만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안네의 집에서 운하 하나 왼쪽으로 건넌 지역이 JORDAN 으로 최근 한창 뜨고 있는 구역이다.


서울로 말하면 연남동이나 상수처럼 예쁘고 아기자기한 카페와 동네 분위기가 여자 마음을 사로잡는 중이라고 한다.



비내리는 일요일 오전을 열심히 걸어보니, 귀티나는 냄새가 자르르 흘렀던 것 같다.


그대로 운하를 따라 30분 쯤 걸어가면,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고흐 미술관 / 하이네킨 박물관 등이 나온다.












유명한 I amsterdam 조형물 뒤로 보이는 건물이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이다.


럼블란트의 그림 등 많은 작품을 볼 수 있는데, 나는 고흐 미술관만 보기로 한다.



비가 정말 많이 내렸는데, 사람들은 우산을 잘 쓰지 않는다.



그래도 독일보다는 양반이다 라는 생각을 했지만, 아무튼 이것들도 우산을 잘 쓰지 않는다.



























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과 조형물, 그리고 너른 잔디밭 끝에는 고흐 미술관이 있다.


고흐가 프랑스, 네덜란드 등에서 작품활동을 했는데 고흐 가문에서 그의 작품을 기증하기로 결정했었다.


그러자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측은, 고흐 작품을 위해 네덜란드 관을 별도로 내어주기로 약속했는데


암스테르담에서는 그를 위한 박물관을 건립하기로 제안하면서, 승자는 암스테르담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작품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으니, 여기에 오면 다 볼 수 있겠지 라는 생각은 하지 않도록.




팁을 하나 더 주자면, 표를 미리 예매해야 한다.


반 고흐 미술관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일자와 입장 시간을 정해 결제까지 할 수 있고 그러면 바로 입장이 가능하다.


정말 의아했던건, 우리도 표를 사기위해 찾아갔더니 정말 말도 안 되게 긴 줄이 놀이동산처럼 빙글뱅글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모니터에 나오는 문구는 '홈페이지에서 결제하면 바로 입장할 수 있어요'



도대체 이 사람들은 왜 서있는거지??


우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홈페이지에 접속해 결제를 했고, 다시 한 번 물었다.


우리 결제 했는데, 바로 입장할 수 있어요? 네. 들어가세요.



띠용.....



확실히 대한민국은 IT 강국 이었다...


유럽 사람들은 편리한 입장 방법을 마련하여 모니터에 실시간으로 뿌려주고 있음에도...2~3시간씩 긴 줄을 서있는다고 한다.. ㄷㄷㄷ








< 그림.. 1885, 빈센트 반 고흐, The Potato Eaters >



《감자 먹는 사람들》은 반 고흐가 그린 초기 회화들 가운데 비교적 큰 사이즈에 여러 사람을 그려 넣은 최초의 그림이다. 이 무렵 반 고흐는 밀레처럼 농촌의 애환을 그리는 ‘농민 화가’가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구차하고 조악한 농부들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그림에 진실을 담으려 했다. 그는 테오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나는 램프 불빛 아래에서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민 손, 자신을 닮은 바로 그 손으로 땅을 팠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려고 했다. 그 손은, 손으로 하는 노동과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식사를 암시하고 있다.”

비록 시간이 흐르면서 주제와 형식은 바뀌어갔지만, 진실을 그리려 한 그의 정신은 초지일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감자 먹는 사람들》에는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그 정신이 생생한 이미지로 어려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감자먹는 사람들 [The Potato Eaters] - 빈센트 반 고흐 (wikimedia commons, 위키미디어 커먼즈)






< 그림.. 1889, 빈센트 반 고흐, Sunflowers >



반 고흐가 [자장가] 좌우에 [해바라기] 그림을 배치하고 싶었다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세 폭 제단화를 염두에 둔 구성이다. 세 폭 제단화는 일반적으로 가운데 그림이 제일 크고 좌우의 그림이 가운데 그림보다 작은 형태로 제작된다. 가운데 그림의 주제는 대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나 성모자상 등이며, 좌우 날개에는 성인들이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전통에 비춰볼 때 반 고흐가     세 폭 제단화를 염두에 두었다는 것은 룰랭 부인을 성모의 위치에 놓고 보려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색채 배치에 있어 룰랭 부인의 머리색인 오렌지색과 해바라기의 노란색이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이렇게 세 폭 그림이 이뤄지면 반 고흐는 그 세트를 자기를 떠나버린 고갱에게 주려고 했다. 1889년 5월에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반 고흐는 자기의 구상을 스케치로 남겼다.

반 고흐에게 해바라기는 많은 의미를 지닌 꽃이다. 그가 일곱 살 때 교회 무덤에서 자기 이름과 똑같은 이름의 아이 묘비를 발견했는데, 알고 보니 자신이 태어나기 1년 전, 태어나자마자 죽은 형의 묘비였다. 그 무덤가에는 해바라기가 피어 있었다. 훗날 반 고흐의 그림에 나타난 해바라기는 왠지 부활과 희망을 느끼게 한다. 특히 이 그림처럼 온통 노란색으로 충만해 ‘빛 위의 빛’을 느끼게 하는 그림은 더더욱 그렇다.

[네이버 지식백과] 해바라기 [Sunflowers] - 빈센트 반 고흐 (wikimedia commons, 위키미디어 커먼즈)








< 그림.. 1887, 빈센트 반 고흐, Self-Portrait with Straw Hat >



빈센트는 스스로를 인물화가로 지칭했을 정도로 인물화 그리길 좋아했다. 동생 테오(Theodore van Gogh)에게 쓴 편지에서 반 고흐는 “내 영혼에까지 감동을 주는 것은 오직 인물 뿐”, “인간을, 살아있는 존재를 그린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물론 그 일이 힘들긴 하지만, 아주 대단한 일임이 분명하다.”고 말하곤 했다. 반 고흐의 인물화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냈다. 그는 인물을 미화시키거나 정형화시키는 것을 거부했으며 매춘부, 농부, 시골 아낙 등 각양각색인 인물들의 개성을 화폭에 거침없는 선들로 표현해냈다. 반 고흐가 테오에게 쓴 편지에는 “나는 완벽한 묘사보다는 모델을 보고 내가 그에게서 받은 느낌, 분위기, 그 사람의 감정을 그대로 작품에 표현하려고 한다.”는 내용이 있다. 반 고흐가 그리고자 한 인물화는 작품 속 인물의 감정과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반 고흐는 또한 인물화를 그리며 색채를 연습하거나 집중력을 길렀다. 그는 동료 화가들에게 그림 실력을 늘리기 위해선 모델을 많이 그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반 고흐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는데 1886년부터 1889년 사이에 무려 서른 일곱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반 고흐가 자화상을 많이 그린 이유는 모델을 구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색대비나 강렬한 색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기 위해 많은 연습이 필요했던 반 고흐는 종종 자신을 모델로 작품을 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빈센트가 1887년 친구에게 쓴 편지에는 그가 모델에게 지불할 돈이 없어 인물화를 포기하고 정물화를 그리며 유화로 채색하는 연습을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은 그가 인물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대상의 감정 묘사가 탁월하다. 작품에는 반 고흐가 느낀 감정들이 때론 강렬한 색들의 대비나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색선 들로 나타난다.


이 그림은 반 고흐가 평소에 즐겨 하던 옷차림을 보여주고 있다. 빈센트의 자화상 중에는 <밀짚 모자를 쓴 자화상>처럼 모자를 쓴 모습이 많이 있다. 이 작품의 특징은 두상이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배경색과 옷의 색, 그리고 얼굴색을 비슷한 색으로 단순화시켰다. 자칫 그림이 밋밋해 보일 수 있으나 반 고흐는 베이지 톤의 배경에 푸른색의 붓터치를 가미함과 동시에 얼굴과 모자에 붉은색계열을 배치해 이 문제점을 해결하였다. 푸른색과 붉은색의 대비는 화면을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데 푸른색은 조금 더 뒤에 있는 듯이 그리고 붉은색은 앞으로 나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여기에 옷의 색을 배경의 베이지색과 통일시키고 옷의 윤곽선을 강조하지 않았고 다른 부분보다 얼굴에 더욱 세심한 붓 터치가 들어갔기에 두상은 화면에서 가장 도드라져 보이는 효과를 얻게 되었다. 이 그림은 반 고흐가 색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작품에서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후의 자화상 그림들에서 빈센트는 <밀짚 모자를 쓴 자화상>보다 더 강렬한 색들의 보색대비를 이용하여 배경과 인물의 옷까지도 여러 색 선들로 메우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밀짚 모자를 쓴 자화상 [Self Portrait with Straw Hat] - 빈센트 반 고흐 (The Bridgeman Art Library, 지엔씨미디어)







< 그림.. 1890, 빈센트 반 고흐, Almond Blossom >




네이버에 설명이 없네요 ㅠㅠ


이 작품은 꽃피는 아몬드 나무. 1890년은 고흐가 생을 마감하기 5~6개월 전으로 정신병원에 있을 때 입니다.


고흐는 동생 테오로부터 조카가 태어났다는 편지를 받습니다. 


편지에는 "형처럼 끈기와 용기를 지녔으면 좋겠다"는 말과, 태어난 아이에게 형의 이름을 붙여주겠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합니다.


이에 반 고흐는 조카 빈센트 빌렘을 위해 맑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아몬드 꽃이 반짝이는 그림을 그려 선물로 주었습니다. 


반 고흐는 젊은 생명의 상징으로 아몬드 나무를 택했는데, 아몬드가 2월의 봄의 전령으로 가장 일찍 꽃 피는 나무 중 하나이기 때문이죠.




"마침내 네가 아버지가 되고, 조안나(테오의 부인)와 아이도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무사하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 소식은 내게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을 주었다. 브라보! 어머니도 얼마나 기뻐하실까?



고흐는 위처럼 동생에게 답장하였습니다.



이에 동생 테오는 "형이 그린 그림처럼 볼이 동그스럼하고 파란 눈을 가진 아이" 라고 화답했습니다.









< 그림.. 1887, 빈센트 반 고흐, Garden with Courting Couples >



이 작품은 상당히 큰 캔버스에 그려졌다. 반 고흐가 작품 제목을 ‘연인이 있는 정원’ 이라고 명명했기에, 비록 인물이 작품에서 은은한 색채로 그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주제임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반 고흐의 신인상주의회화의 새로운 시작을 야심 차게 알렸다. 그는 세부까지 정밀하게 구성함으로써 전경이 너무 단조로워지는 것을 막았으며 동시에 장식적인 면모도 살렸다. 이는 앵데팡당전에서 관찰한 쇠라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연인이 있는 정원, 셍피에르 광장 [Garden with Courting Couples : Square Saint - Pierre] - 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 전시 본부)





< 그림.. 1888 빈센트 반 고흐, The Yellow House >



예술가의 유토피아를 만드는 것을 꿈꾸며 아를에 온 빈센트 반 고흐는 1888년 5월, 역에서 가까운 라마르틴(Lamartine) 광장에 집을 빌렸다. 이 작품은 반 고흐가 이곳에 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1888년 9월 말에 그린 것이다. 낮인지 밤인지 판단할 수 없는 하늘의 짙은 청색이 화면의 반을 점하고 있는 황색과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반 고흐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그림은 유황색 태양 아래 순수한 코발트빛 하늘과 집, 그 주변을 그린 것이야. 어려운 모티프지!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극복하고 싶어. 아무튼 태양빛 아래의 노란 집들과 청색의 비할 데 없는 산뜻함이란 굉장해. 지면은 완전히 황색이지.” 청색과 황색은 반 고흐가 베르메르(Johannes Vermeer)를 모방하며 남프랑스 광경 특유의 것이라고 감탄한 것으로, 이 작품의 주제는 이 두 색에 의한 색채의 강렬한 대조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반 고흐는 이보다 조금 전에 베르나르에게 쓴 편지에서 “그들이 일찍이 명암의 대조에서 그리 해 왔듯이, 우리들은 색채로 제작하여 이론을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되네”라며 베르메르와 비교하면서 스스로 생각한 제작 논리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반 고흐는 근대예술에 공헌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색이 아닌 자유로운 색채로 그려야 하며, 모티프 역시 근대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화면 오른쪽 안으로 진행하는 몽마주르 거리로 눈을 돌리면 기차가 보인다. 그 기차는 실제로 아를 역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브르타뉴에 있는 고갱을 자신의 집으로 오도록 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0월에 고갱은 고흐의 노란 집으로 와 2개월 가량 함께 생활하였다. 이 그림은 유토피아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단지 거리 한 구석의 일상을 그린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반 고흐는 이러한 풍경을 자유로운 색채의 모티프로 선택해 그만의 유토피아로 표현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란 집 [The Yellow House] - 빈센트 반 고흐 (The Bridgeman Art Library, 지엔씨미디어)







< 그림.. 1888 빈센트 반 고흐, The Sower >



들에서 하는 노동을 주제로 하는 작품을 고흐는 여러개 그렸는데 가장 마지막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여름에 그려졌던 그간의 작품들과 내용과 기법에 있어 아주 다르다. 이 그림속의 태양은 더 이상 뜨겁게 타오르지 않는데, 

이는 점차 줄어들고 있었던 고흐의 에너지를 상징하는 것 같다.


고갱의 존재는 고흐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주지 않고 오히려 그를 파괴하고 있었다. 고흐의 병은 엄청나게 빨리 진척되고 있었다. 


그는 더 자주 환각상태에 빠졌고, 제 정신으로 돌아올 때면 녹초가 되어 있었다. 고흐는 고갱으로부터 이해를 받지 못한 것에 대해 격노했고, 


이 때문에 늘 견디기 어려운 긴장상태에 있었다.









< 그림.. 1890 빈센트 반 고흐, Irises >


붓꽃(아이리스)은 빈센트 반 고흐가 1888년부터 몰두했던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심지어는 생 레미(Saint-Rémy)의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붓꽃 그리기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는 붓꽃이 불안한 영혼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해 주는 형태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했다.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한 이후, 정원의 화단에 피어 있는 붓꽃을 흥미롭게 관찰했던 반 고흐는, 화단으로부터 붓꽃이라는 모티프를 관념적으로 추출하여 캔버스 위에 되살렸다. 작품의 구성은 반 고흐가 아를의 ‘노란 집’을 장식하려고 그렸던 작품 <해바라기>와 그 구성 면에서 유사하다. 작품의 전경에 놓인 꽃병은 주의를 환기시키고, 보는 이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꽃병은 배경과 유사한 톤의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그 경계는 모호하여 단지 어둡고 희미한 윤곽선으로만 구별된다. 그림자가 없이 그려진 꽃병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반 고흐는 보색들을 거침 없이 사용함으로써, 그 사이에 조화를 더욱 강조하고자 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선명한 레몬 빛의 노란색 배경은 순수한 감청색과 양홍색이 섞인 보라색의 붓꽃을 두드러지게 한다. 꽃은 잘 드러나지 않는 수많은 점들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작고 긴 붓질로 정확하게 묘사되었다. 그리고 고갱의 종합주의적 양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짙은 윤곽선으로 인해 꽃잎의 물질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오른쪽에 그려진 부러진 붓꽃의 잔가지는 반 고흐의 의도적 구성으로서, 작품에 전체적으로 균형감을 불어넣고 있다. 

사후의 반 고흐의 인기나 그의 작품들의 유명세 등을 고려하면, 생전의 그가 주목 받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실제로 반 고흐 생전에 판매된 작품은 1888년에 그렸던 <아를의 붉은 포도밭> 단 한 점뿐이었다. 하지만 20세기에 이르러 특히, 1980년대 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반 고흐의 작품들은 경매에서 매번 최고가를 경신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데, 이 작품 역시 1987년 뉴욕에서 동시대 회화 중 최고가에 판매되어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으로 유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붓꽃 [Irises] - 빈센트 반 고흐 (The Bridgeman Art Library, 지엔씨미디어)





< 그림.. 1890 빈센트 반 고흐, Wheatfield under Thunderclouds >





< 그림.. 1890 빈센트 반 고흐, Wheatfield  with Crows >




1890년 5월 빈센트 반 고흐는 생레미의 요양원을 떠나 파리 근처의 오베르쉬르우아즈로 향했다. 이곳에서 반 고흐는 의사이자 아마추어 화가인 가셰 박사의 보호를 받았다. 가셰 박사는 치료의 일환으로 반 고흐에게 그림에 몰입할 것을 권했다. 반 고흐는 가셰 박사의 초상이나 인근의 밀밭과 화가 도비니의 정원 같은 주변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언제 다시 발작이 도질까 걱정하면서도 반 고흐는 잠시 평화로운 시간을 즐겼다. 반 고흐는 아를에 머물 때부터 밀밭을 그려왔고, 생레미의 요양원에 있을 때는 창 밖으로 보이는 밀밭 풍경에서 영감을 얻어 연작을 그리기도 했다. 반 고흐에게 밀밭의 노란색은 빛에서 파생된 것이었고, 이에 매료되어 강렬한 필치로 그렸다. 그는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도 밀밭을 주제로 한 풍경화를 여러 점 제작했는데, 모두 이 그림처럼 가로로 긴 캔버스에 그려 밀밭의 광활함을 강조한다. 

<까마귀가 있는 밀밭>은 반 고흐가 자살하기 직전인 1890년 7월에 그려졌고,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다. 표면에서 요동치는 빠른 필치로 거칠게 그려진 어둡고 낮은 하늘과 불길한 까마귀 떼,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전경의 세 갈래의 갈림길은 자살 직전 그의 절망감을 강하게 상징하는 듯하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는 성난 하늘 아래의 거대한 밀밭을 묘사한 것이고, 나는 그 안에 있는 슬픔과 극도의 외로움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썼다. 하지만 이 편지 구절이 정확히 이 그림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몇몇 학자는 같은 시기에 그려진 <나무 뿌리>가 마지막 작품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또한 분명하지 않다. 이 당시 그의 심리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었고, 반 고흐는 37세인 1890년 7월 27일에 들로 나가 가슴에 리볼버를 당겼다. 그는 즉사하지 않았고 라부 부부의 여인숙으로 돌아와 이틀 뒤 동생 테오가 바라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반 고흐가 죽은 뒤 테오의 건강도 급속히 악화되어 6개월 뒤 위트레흐트에서 사망했다. 두 형제는 오베르쉬르우아즈의 묘지에 나란히 묻혀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까마귀가 있는 밀밭 [Wheatfield with Crows] - 빈센트 반 고흐 (The Bridgeman Art Library, 지엔씨미디어)



같은 시기에 그린 밀밭 작품이 참 대조적이다.

고흐가 이 때, 의사로부터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했는데, 끝내 권총으로 자살하게 된다. ㄷㄷ








고흐 미술관을 구경하고서 향한 곳은 근처의 하이네킨 체험관.


입장료는 13유로인데,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분수대 옆 티켓 판매하는 곳에서 10유로에 팔고 있다.



개인적으로 암스테르담에 왔다면 한 번 쯤은 가볼만한 곳이라고 생각됬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처럼 단순한 컨텐츠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  






물론, 시작은 지루하다.


대신 한 가지 좋은 점은 하이네킨 직원들의 가이드 투어가 붙는다는 것.


하이네킨의 유래에서부터 역사 변천과정, 그리고 맥주를 만드는 모든 과정까지 직원이 붙어 영어로 설명해준다.


아참, 체험관 들어오는 입장 줄은 길지 않으나 사람은 끝이 없는 편이다.


내부가 좁은 편이라 북적거리는 면은 없잖아 있었다. 







약간은 지루한 설명은 여기까지.


맥주를 만드는 단계별 기계들을 살펴보고 






옛날에는 맥주를 말이 운송해서 하이네킨 자신들의 큰 자산으로 여긴다는


그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뭐 그런 철학까지 다 들었다면, 이제! 먹는일만 남았습니다. 





하이네킨 맥주는 각종 스포츠들을 후원하고 있죠.


그 중 대표적인 애들이 럭비와 축구, 레이싱 등인데 이렇게 체험하는 걸 만들어 놨어요.


남자 4명이 여기 들어가면... 반나절 잡고 가야 할 겁니다.












그리고 위닝 등 PS 게임도 엄청 많아요.


내기 게임 하면 정말 남자들 답 없이 놀고 올 수 있는 곳. 





아참, 중간에 맥주 시음이 있어요.


하이네킨 체험관에서 총 맥주는 3~4잔 정도 먹을 수 있습니다.


한참 위에 맥주 만드는 기계 있는 곳에서 발효 전 맥주 맛을 아주 조금 느끼게 해줘요. 약간 숭늉맛이 났던 것 같네요.


그리고 이 곳에서 훈훈한 직원이 맥주 한 잔을 따라주죠. 


그리고 나면, 맥주 따르는 시연하는 곳이 있어요. 거기서도 한 잔. 










위닝게임을 하고 나면 이렇게 스탠드 바가 등장합니다.


입장할 때 동그란 똑닥이 2개가 붙어 있는 팔지를 주는데요, 이 곳에서 그 똑딱이로 맥주를 교환할 수 있어요.


일반 맥주 한 잔에 똑딱이 1개를 받는데, EXTRA COLD는 2개를 받아요.


반드시 EXTRA COLD를 드셔보세요. 어떤 면에서 차이가 나는지 모르겠지만 흔히 먹던 맛과는 분명 달랐어요.


이렇게 맥주까지 시원하게 마무리하면 체험관 끝.






맥주를 먹고 한참을 돌아다니다 향한 곳은 홍등가! 


암스테르담의 상징으로도 불리는 RED DISTRICT.!


※ 홍등가 사진은 전부 퍼온 사진입니다. 여기선 사진 함부로 찍다가 큰 일 나요. 절대로 꺼내지도 마세요.




 낮에는 평온합니다.






 하지만, 밤이되면..!!!!


 저희는 홍등가 가이드 투어를 신청했어요. 구글에서 Red district Guide tour를 검색하면 여러 사이트가 나옵니다. 높은 평점으로 예약하세요.


 가이드 투어는 영어로 진행하고, 2시간(19~21시) 동안 홍등가 역사에서부터 가격 및 기타 자세한 내용을 설명해줍니다. 13유로정도.


 개인적으로는 가이드투어를 꼭 신청하세요. 저희는 미국인이 설명해줬는데 말이 너무 빨라 60%쯤 이해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미국인 특유의 개그코드는 제가 너무 사랑하는 점이죠 ㅋㅋ 설명 잘 하다가 마지막에 톡 한방 쏴주는 센스.












 

 홍등가는 크게 5개로 볼 수 있습니다. (지역으로는 3구역)


 홍등가 입구와 외곽에 많은 Sex Shop. 정말 온갖 기구들이 다 있는 것 같아요.


 여자 가이드가 거기가 작은 남자들은 여기서 기능성 콘돔을 구매하라는 말이 기억 나네요 ㅋㅋ


 그리고 저쪽에 가면 끝내주는 바이브레이터가 있으니 여자들은 당장 돈을 꺼내라고 ㅋㅋㅋㅋㅋㅋ









 다시 말씀드리지만 홍등가 사진은 전부 구글에서 퍼온거에요. 사진 이렇게 찍다가 걸리면 답 없습니다.


 홍등가가 무섭지는 않다지만, 마리화나 냄새로 가득하기도 합니다.


 홍등가를 구성하는 또 한가지. Coffee Shop과 마약 파는 곳.


 암스테르담에서 Coffee Shop은 마리화나를 팔면서 필 수 있는 곳이에요. 우리나라의 카페는 Cafe SHop을 찾아야 합니다.


 홍등가에는 Coffee Shop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요.


 아참.. 홍등가를 다니면서 아랍계열이나 딱 봐도 깡패같은 무리는 피하세요. 가이드도 저희 무리를 이끌면서 그네들이 보이면 바로 주의를 시킵니다.


 째네 마약하고 다녀서 재정신 아니라고 괜히 잘못 걸리면 복잡해진다고.







 홍등가를 구성하는 나머지 3개는 Red Light District, Blue Light District, Green Light District 입니다.


 Red Light는 흔히 말하는 성관계가 가능한 것을 의미해요.

 가이드 말에 의하면 정찰제라서 돈을 협상할 수 없다네요.


 Blue Light는 남자에요.. 성전환을 했거나 아니면 아직 수술 전 이거나.. 뭐 그렇다네요..

 여기는 가격 협상이 가능하데요. 오로지 너의 말빨에 따라 달려있지만 최소 50유로까지만 가능하다고..


 Green Light는 정확히 설명을 못 들었어요. 

 아마 체험관이나 그런게 아닐까 싶은데...


 그리고 여러 Shop들이 있어요.

 스트립쇼를 구경할 수도 있고, 남녀가 실제로 관계하는 걸 볼 수도 있어요. 
















 홍등가 옆에는 암스테르담 구교회가 있는데 이 곳에는 성 노동자들을 위한 기념비도 세워져 있어요.


 투어는 이렇게 마무리 됩니다. (보통 담 광장에서 19시에 집결해서 구교회에서 마무리됩니다.)


 홍등가라고 하지만 그 곳에는 일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도 많아요.


 쉽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암튼...그렇습니다.




















 암스테르담은 있을 땐 몰랐지만, 자유롭고 즐길곳많고 여유로운 그런 곳 인 것 같아요. 날씨만 좋았으면 최고였는데.. ㅎㅎ 비만 잔뜩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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